ㅇ 1990년 도입된 방송외주제도가 내년이면 이제 20년이 된다. 국내 방송산업을 상징하는 정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외주제도는 아직까지 찬반의 입장이 확연히 나뉘어져 있으며 그 성과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이 제도가 지상파방송에게는 규제로 작용하고 독립제작사에게는 지원의 측면이 있어 이해당사자 간의 대립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정책의 정당성(legitimacy)과 실용성(practicality) 간에 괴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정책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에 대한 정당성이 존재해야 하며, 동시에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이 실제 행위에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외주제도는 정책의 목표가 실제 방송 현실에 적절히 적용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 왔다.
ㅇ 가장 큰 문제는 의무편성비율 정책이 형식적으로는 지상파방송의 외주제작 비중을 높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외주제작이 자생력을 갖기보다 지상파방송에 종속되도록 만드는 원인을 낳았다는 것이다. 외화내빈으로 양적 성장은 가져왔지만 수익이 외주사로 흘러가지 못하고 영세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전체 등록 독립제작사 중에서 40.9%에 해당하는 사업자가 방송사 납품실적이 전무한 상태로 나타났다. 전체 제작시간에서 외주제작 시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6.3%에 불과하다.
ㅇ 물론 드라마 장르에서 외주제작은 질적 성장과 해외 창구를 통한 성공가능성을 열었지만, 저작권 확보의 문제로 거래에 있어서 지상파방송사와 드라마 외주제작사 간의 갈등만 심화시켰다. 2004-2006년까지 방송산업실태조사에 나타난 외주제작물의 외주사 저작권 인정비율은 전체의 약4.8% 수준이다(이후 실태조사에서 구체적 내용은 비공개).
ㅇ 이러한 상황은 외주제도를 지탱하던 기존 정책패러다임을 바꿔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형식적인 외주제작 의무편성비율 정책에서 수익이 외주사에 흘러들어가 전체 방송시장의 규모를 키우는 적극적 진흥방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방송통신융합으로 방송콘텐츠산업의 제작시장이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유연제작구조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부응할 수 있는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 두 가지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안은 바로 ‘출판사형 방송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다. 다양한 제작원으로부터 생산된 콘텐츠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방송 전체 생태계에서 제작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외주제작, 공동제작 그리고 제작시설의 스핀오프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활동을 적극 추진하는 사업자에게 다양한 지원프로그램을 제공하여 동기부여할 필요가 있다.
ㅇ 다른 한편 외주사가 유연제작구조를 확보하면서도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외주제작구조를 하청형에서 ‘스튜디오’형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기존 외주제작은 방송사가 지급하는 제작비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에 글로벌 경쟁이 가능한 콘텐츠의 제작에 한계가 있다. 따라서 미국처럼 신디케이션이 제작사의 방영권을 선구매하고 제작비를 지급하는 비즈니스 리스크 분담체계가 필요하다. 이러한 미국 모델을 보완한 ‘한국형 스튜디오 모델’을 새로운 외주제작 형태로 제안하고자 한다. 한국형 스튜디오 모델이란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도록 자본력을 갖춘 스튜디오가 신디케이션 기능과 제작투자 기능을 총괄하는 방식이다. 국내의 경우, 신디케이션 기능이 아직 미성숙되어 있기 때문에 후방창구에서 방영권을 미리 거래할 수 없다. 따라서 강력한 자본력을 갖춘 스튜디오가 외주사로부터 방영권을 선구매하여 후방창구(유료방송시장)에 판매하고 동시에 투자를 유치하여 제작비를 외주사에게 지급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는 거대 규모의 제작비를 다원화하고 지상파방송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외주제작의 비즈니스 리스크를 분산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은 한국형 스튜디오 모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후방창구시장의 규모가 커야한다. 최근 종편PP, IPTV가 등장하거나 도입이 예견되면서 후방창구시장이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ㅇ 마지막으로 외주거래에 대한 불공정 행위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 마련이 필요하다. 공정위가 무혐의를 처리했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방송산업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나아가 방송통신융합으로 플랫폼-콘텐츠 사업자 간에 불공정경쟁행위가 증가할 전망이다. 따라서 차제에 이러한 문제를 총괄적으로 규율할 수 있는 (가칭)콘텐츠유통거래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이는 방송프로그램을 포함한 콘텐츠의 유통을 촉진하고 콘텐츠 독점 또는 차별과 같은 불공정경쟁을 방지하기 위한 특수목적을 갖는다. 일반경쟁규제를 하는 공정위의 한계를 보완하면서 방송, 게임, 모바일콘텐츠 등 콘텐츠 전 분야에 공정경쟁 여건을 조성하는 특수영역규제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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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외주제작제도 사례와 국내 적용 가능성
(정준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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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 외주제작 제도의 전개 과정
ㅇ 1982년에 외주제작 전문 지상파 방송사 (publisher-producer) 채널4가 등장하면서 영국 독립제작 환경에 일대 혁신이 발생.
ㅇ 공영 BBC와 민영 ITV 사이의 복점구도가 영국 텔레비전 방송의 안정적 성장과 대내외적 경쟁력을 보장해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의 ‘주류적’ 감수성에 도전할 새로운 문화적 자극이 필요하다는 판단.
ㅇ BBC와 ITV에서 경력을 쌓은 방송제작 인력들 일부와 주류에 진입하지 못했던 소수파 문화 인력들이 결합하여 방송사로부터 명실상부한 ‘독립적인’ 제작 시스템을 형성.
ㅇ 채널4는 다양한 소수문화들을 반영하고 문화적 다양성과 도전성, 창의성을 촉진시키는 역할 담당. 이에 제도화된 주류적 방송 제작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종류의 창의적 아이디어가 현실화되기 시작.
ㅇ 독립제작자 단체인 PACT의 로비가 성공하여 1990년 방송법이 공공서비스 지상파 방송사들에게 25%의 독립제작 쿼터(편성시간 단위)를 부과. 독립제작사들의 비약적인 성장 이끎. 채널4 출범이후 10년 동안 독립제작사의 수가 1000개까지 증가.
ㅇ 2003년 커뮤니케이션법은 기존의 25% 독립제작 쿼터를 유지하되 해당 정책을 더욱 정교화하는 방식으로 구성. 예컨대,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BBC에 대한 규제기구(오프콤)의 직접 감독, BBC 각 채널에 대한 개별 쿼터 산정, 편성시간과 제작비를 모두 고려한 쿼터 규제, 제작비 표준요율표 작성, 투명 거래를 위한 교역조건 정식화, 저작권 관련 규정 명확, 지방제작 활성화, 전산업적 교류/협력/훈련 추진.
ㅇ 2006년 BBC 왕실칙허장이 갱신되는 과정에서 BBC는 자발적으로 WoCC(창의적 경쟁의 창) 정책 도입: 요컨대 25% 독립제작이 최대치라기보단 최소치가 되도록 하는 정책. 자체제작 50%와 독립제작 25%를 보증하는 한편 나머지 25%를 두고 자체부문과 독립부문이 ‘창의성’을 두고 경쟁토록 함. “텔레비전 수신료는 영국을 위한 창의적 기금”이라는 레토릭 등장.
ㅇ 각 방송사들이 교역조건 정식화, 저작권 관련 규정이 독립제작사에게 우호적인 방향으로 개정, 수익공유 모델 다양화, BBC가 도입한 WoCC 정책이 현재까지는 독립제작사에게 유리하거나 최소한 공평한 방향으로 시행되고 있음 확인.
2. 성공 요인
ㅇ 정책 당국의 확고한 철학과 방향성: 문화적 다양성, 관점의 복수성, 소수문화에 대한 관용, 창의성 중시 정책. 한편에서는 방송을 과도하게 시장화시키려는 의도가 없지는 않았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과거의 틀을 깨고 창의성과 경쟁력, 새로운 확장을 이끌어낸 면이 있음.
ㅇ 채널4의 설립이나 독립제작 쿼터 정책처럼, 직접 지원과 진흥을 꾀하기보다는 간접적인 형태의 부문 활성화 정책을 취함. (정부가 기금 형식으로 직접 지원하는 것은 국제법상으로 난점이 존재하는 이유도 있음.) 단순히 방송사의 ‘몫’을 떼어 독립제작 부문에 나눠줬다는 게 아니라, 방송제작산업 전반이 확대되었고 새로운 창의적 인력들이 발굴되었으며 자기혁신의 계기가 되었음이 최소한 공유되고 있음.
ㅇ 영국 방송영상 콘텐츠의 국제적 영향력은 전지구적 영-미 문화의 지배력, 단일화된 유럽시장, 광범위한 영어권 국가라는 배경 없이는 불가능했음. 해외판매 시장이 활성화되고 그에 따라 국내 방송제작 시장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선순환 구조가 유지될 수 있었음.
ㅇ 여기에는 또한, 고품질 다큐멘터리, 아동 프로그램, 고전/혁신 드라마, 창의적 오락 프로그램에서 강점을 보여준 영국의 국가 이미지와 이에 직접적으로 연동된 BBC라는 글로벌 브랜드의 가치를 빼놓을 수 없음. 영국 문화부가 (법, 정책, 진흥책, 기금 등을 활용하여) 지속적으로 방송 부문과 범예술문화 부문을 생상적으로 연계시켜 이들 사이의 호혜적 관계가 성립될 수 있도록 촉진: ‘창의 산업’
3. 변화된 환경
ㅇ 독립제작 부문이 지속적으로 확대된 결과, 방송사와 대등한 협력이 가능할 정도의 글로벌 다국적 거대 독립제작 그룹(이른바 슈퍼 인디)이 등장. 한때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중소규모(SMEs) 독립제작사들이 점차 위축되는 경향. 전자는 소위 적자예산 모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오히려 저작권 활용을 통한 초과 이윤 창출 도모. 후자는 전체 제작비를 지원받는 대신 마진의 폭이 대단히 좁고 방송사와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를 선호하여 방송사에 종속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ㅇ 사모펀드 등이 슈퍼 인디의 가능성에 주목하여 지난 몇 년간 치열한 인수합병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일부 거대 독립제작사들의 몸값이 과도하게 상승되었던 경향이 있었음. 하지만 광고 시장의 침체와 경제 위기가 겹치면서 ‘금융공학적’인 경로로 덩치를 키웠던 슈퍼 인디들에게서 거품이 끼거나 터지기 시작. 수익 구조가 생각보다 건전하지 못하다는 점을 인식한 금융권이 관심을 멀리하자 독립제작 부문에 먹구름이 끼고 있음.
ㅇ 해외시장과 다채널 다중플랫폼 상황을 염두에 둔, 포맷 수출과 기타의 저작권 활용을 목표로 하는 독립제작 양식이 확대, 그러나 (아무리 큰 해외시장을 갖고 있고, 국내 산업의 규모가 큰 영국이라고 해도) 독립제작 부문 매출액의 대부분은 기존 공공서비스 방송사들로부터 나오며, 추가적인 수익실현 구조는 그다지 안정화되어 있지 않음. 게다가 인기 출연진이나 제작자에게 지불되어야 하는 비용이 지나치게 상승하여 제작예산에 대한 압박이 매우 커진 상태
4. 시사점과 함의
ㅇ 정책 당국의 확고한 철학과 정책 실현 수단이 필요함. 예를 들면, (단순한 기술/산업 중심적인 수익성 논리에서가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의 확대, 사회적 창의성 고양 등과 같은 규범적 원칙들이 제시되고 최소한 느슨하게나마 전산업 차원에서 공유되어야 함. 이러한 원칙에 맞추어 전 부문에 걸쳐 문화예술과 방송을 연계하는 협력-경쟁 구조를 구축해야 함. 분산된 기금들을 통해 중구난방 직접 지원하는 진흥책으로는 독립제작 부문의 활성화는 물론 그것의 ‘창의적’ 기여를 기대하기 어려움.
ㅇ 해외시장의 확대라는 과도한 기대에 의존한 마케팅에 힘쓰기보다는, 방송사들이나 거대 제작사들의 ‘안정위주 제작 마인드’로는 생성되기 어려운 중소 독립제작자들의 창의적 아이디어의 현실화를 지원하는 법제도와 진흥 수단을 마련해야 함. 예컨대 영국 독립제작 부문이 알게 모르게 추진해온 ‘작은 할리우드’ 모형도 절반의 성공에 불과하고 경제적 불안정성에 비추어 그다지 건강한 대안이 될 수 없음이 증명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른바 ‘한류’에 대한 과도한 기대 유발은 오히려 창의성의 기반을 허물고 천박한 수준의 시장논리만 강화시킬 우려가 있음.
ㅇ 영국의 경우 BBC라는 강력한 글로벌 브랜드와 막대한 수신료 기금이 존재하지만, 한국에는 이에 대응할만한 공적 행위자와 물적 기반이 부재하거나 비교적 취약한 편. 지상파 방송사들을 중심으로 이들이 공공적인 ‘창의성의 기반’이 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육성 방안을 마련함과 동시에, 바로 그런 기반에서 이들이 여타 독립적인 부문들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촉진하고 압박하는 정책 수단을 도입해야 함. 이런 측면에서 영국의 채널4 사례라든가 한때 고려되었던 PSP(public service publisher) 즉 공공서비스 콘텐츠 기획/발주자(방송 프로그램에만 제한되지 않는 다플랫폼적 콘텐츠에 집중하는 공적 주체)의 한국적 가능성, 즉 출판사형 방송형태의 국내 도입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음. 비록 영국에서는 이미 채널4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고, BBC 역시 일부 그런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현실화되지는 못했으나, 한국에서는 고려해볼만한 아이디어라고 봄.
ㅇ 만약 종편채널이 현실화된다면, 이들의 기반은 사적이고 탈규제적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공공 기능이 원활히 실현되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연히 산업으로서 풀어주기보단, 이를테면 채널4의 시대적 역할이 그랬듯, 기존 주류 방송사들이 하지 못했던 영역을 개발하고 이를 대중화시키는 방향으로 유도해야 함. 따라서 일정한 원제작(original production) 쿼터에 부여하고, 주류 장르와는 구별되거나 주류 장르 안에서의 새로운 문화적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외주제작 쿼터를 강제하는 것이 바람직함.
ㅇ 세계적으로 콘텐츠 포맷 산업이 활성화될 것은 물론, 국제 교역 차원에서 저작권 관련 분쟁이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표절 시비를 벗어나 기존 포맷의 창의적 변용을 또 다른 종류의 창의적 제작으로 간주하도록 저작권 관련 규정을 세부적이고 명확하게 수립하여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음. 이로부터 플래폼 사업자, 방송사, 제작자 사이의 합리적인 수익 실현 및 공유 모형이 구축되어야 함.